행정중심복합도시 제1호 지정문화재 탄생
▶의령남씨 문중유물 12점을 행정중심복합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청장 한만희)은 2010년 8월 25일 문화재위원회를 개최하여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성강리에 있는 의령남씨 문중유물(소유자 남대현) 12점이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어 행정중심복합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 의결하였고 이번에 관보고시를 통해 국민들에게 지정사실을 알리게 되었다.
지난 2006년 행복청이 건설공사로 인한 문화유산의 훼손․멸실을 방지하고 보존할 목적으로 실시한 문화재 일제 조사 과정에서 화재 또는 도난 등에 취약한 환경에서 보관 중인 문화재를 발견하고 문중과 협의 후 기탁받아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위탁보관하고 있다.
이번 문화재지정은 전문가의 현지조사 및 관보예고 등 문화재보호법 및 행복도시문화재보호고시가 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으며, 최종적으로 문화재위원회에서 유물의 전래과정이 확실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학술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받았다.
제1호 행복도시 문화재는 조선중기 공신인 남이웅(南以雄, 1575~1648) 선생의 진무공신교서, 사패교지, 고신교지 등 8점이며, 제2호는 남이웅 선생의 초상 2점과 초상초본 2점 등 4점이다.
이 중 진무공신교서는 조선 인조 때 발생한 이괄의 난을 평정한 남이웅 선생의 공적을 인정한 교서로서 이괄의 난과 그 당시 인물, 공신포상규정 연구 등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불윤비답 또한 현존사례가 많지 않고 5건이 연속된 비답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 그 가치가 크다.
중국사행 중 중국화가가 선생을 그린 초상은 17세기 초 중국초상화의 전형적 특징을 보이는 우수한 작품이며 조선시대 사신과 중국화단과의 교류를 보여준다. 다른 초상 1점은 이모본이지만 조선시대 초상화의 양식적 변화를 하나의 화폭에 반영하여 학술적 가치가 높다. 초본 역시 조선 중기 작품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들 문화재는 지정되기 전인 작년 11월 행복청이 국립공주박물관, 공주시청과 공동개최한 특별전『공주의 명가』에 출품되어 일반인들에게 소개된 바 있다.
행복청관계자는 “행복청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아름다운 도시건설을 기본목표로 삼아 지역의 전통문화와 역사를 보존, 계승하여 도시의 정체성을 살리는 문화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또한 “문화도시를 지향하는 행복도시에 건립예정인 국립박물관에 이들 지정문화재를 전시하여 국민들의 문화교육현장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행복도시 문화재지정 보도자료 관련 참고자료
□ 남이웅(南以雄, 1575~1648)
남이웅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적만(敵萬), 호는 시북(市北)이다. 1606년(선조39)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왕자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는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춘성군(春城君)으로 봉해졌다. 1636년 병자호란을 겪고, 이듬해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심양(沈陽)에 잡혀갈 때 세자를 극진히 호위하였으며, 돌아와 춘성부원군에 봉해졌다. 1646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어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 소현세자의 빈)의 사사(賜死)를 반대하여 사직하였다.
□ 남이웅 진무공신교서(南以雄 振武功臣敎書)
이 문서는 남이웅(南以雄)이 1625년(인조3년) 4월에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받은 교서(敎書)이다. 교서에는 남이웅이 진무공신(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준 공신호) 3등에 해당하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진무공신에 대한 포상규정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공신관계 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아 행정중심복합도시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었다.
□ 남이웅 사패교지(南以雄 賜牌敎旨)
사패교지(賜牌敎旨)는 왕이 신하에게 토지, 노비 등을 내려줄 때 쓰는 문서이다. 이 문서는 1633년(인조11년) 3월 19일에 진무3등공신(振武三等功臣)인 춘성군(春城君) 남이웅에게 역적 정윤서(鄭允緖), 이경검(李景儉), 이준(李遵), 이방좌(李邦佐) 등이 소유했던 노비 8명을 내리는 사패교지로서 행정중심복합도시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었다.
□ 남이웅 고신교지(南以雄 告身敎旨)
교지(敎旨)는 1425년(세종7년) 7월에 왕지(王旨)를 개칭한 것이며, 문무관(文武官) 4품 이상의 관리에게 관직을 내리는 고신(告身, 조선시대 관리로 임명된 자에게 수여한 증서)이다. 이 문서는 1648년(인조26년) 윤 3월 2일에 남이웅을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으로 임명하는 교지로서 남이웅 사패교지와 함께 고문서의 연구 및 남이웅 전기(傳記)의 자료로서 가치가 있어 행정중심복합도시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었다.
□ 남이웅 불윤비답(南以雄 批答)
비답(批答)은 신하의 상소(上訴)에 대한 임금의 대답을 말한다. 이 문서는 의정부(議政府) 우의정(右議政) 남이웅(南以雄)이 1647년(인조25년) 2월 3일, 2월 5일, 2월 8일, 10월 26일, 10월28일 등 5차에 걸쳐 신병을 이유로 사직을 올리자, 간곡히 만류하는 인조의 비답이다. 비답의 경우 문집이나 서책에 전해져 내져옴으로써 문서로서의 가치는 상실되지만, 남이웅의 비답은 사례가 많지 않고 5건이 연속된 비답으로 형태가 완전하며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행정중심복합도시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었다.
□ 남이웅 초상(南以雄 肖像)
이 초상은 1626년(병술년) 남이웅(南以雄)이 좌의정(左議政) 시절에 그려진 초상화를 범본으로 삼아 후대에 이모(移摹, 원본을 옮겨 그린 그림)된 것으로 추정되며, 하나의 화폭 안에 여러 시대의 양식들이 혼재되어 나타난다는 것이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비록 18세기 이후에 이모된 것이지만, 시대적 추이에 따른 조선시대 초상화의 양식적 변천이 융합되어 하나의 화폭 안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등 그 가치가 뛰어나 행정중심복합도시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었다.
□ 남이웅 초상(南以雄 肖像) 1627년 작(作)
이 초상은 1627년 남이웅(南以雄)이 중국 명나라 수도 북경(北京)에 사신으로 갔을 때 진방정(秦邦禎)이라는 중국인 화가가 그린 것으로 17세기 초 중국에서 유행하던 초상화 형식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중국을 왕래하였던 사신들과 중국 화단(畵團)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서 행정중심복합도시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었다.